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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6장225,226절강해

누가복음6장 225,226절   요한이 그의 제자들 중 둘을 불러, 예수님에게 보내었는데, 말하길, “당신이 오실 분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립니까?”  남자들이 그 분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우리를 당신에게 보내었는데, 말하길, ‘당신이 오실 분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립니까?’ 누가복음 225, 226절 말씀입니다. 두 절이 중복되어서 함께 강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226절은 ‘남자들이~’부터 시작됩니다.  ‘남자들이’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전하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사람들을 보내 전합니다. ‘그 분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며, 예수님에게 와서 전합니다.  ‘세례 요한이 우리를 당신에게 보내었는데, 말하길’ 예수님을 따르라고 전한 것이 아니라 질문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띄워 주었습니다.  12제자중의 요한과 안드레도 처음에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지금은 세례요한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력과 비교가 안됩니다.  그래서 염탐하러 보냈습니다. ‘당신이 오실 분이십니까?’  ‘메시야’로서입니다.  분명히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너는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  예수님을 향한 하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증거 할 때 자신은 예수님의 신들메도 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증거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짧으면 6개월 길게는 2,3년입니다.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립니까?’  이 질문을 통해 세례요한의 영의 맛이 갔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장담 못합니다.  어제 수많은 사람을 안수한 사람이 오늘 지옥에 떨어진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어제 안수 받은 신앙 연약한 사람이 지금 천국에 있는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세례요한은 남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했고, 죄에 대한 책망을 했으며,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로 봤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6장224절강해

누가복음6장 224절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그에게 전했습니다. 누가복음 224절 말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그에게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커지자 군중들이 따라다니고 죽는 자가 살아나고 기적이 나타나니까 당시 기존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틀에서 참신앙을 찾은 요한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참신앙이 나타난 겁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요한의 가르침을 받고 세례를 받으며 진짜 은혜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규모가 큽니다.  요한 쪽은 수십명인데 예수님 쪽은 수만명입니다.  얼마나 당황되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일부 예수님 쪽으로 빠져 나갔습니다.  요한은 기적이 없지만 예수님은 기적이 있고 군중도 많고 게다가 요한도 예수님께로 끌려가게 됩니다.  나중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막판에 요한의 제자들이 당황되니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요한에게 이런 일이 나타났다고 전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참인데 또 참이 나타나니 의심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세례를 주며 사촌이기에 또 잘 압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의심을 하게 되는데 제가 볼 때는 세례요한의 사역이 예수님 전에는 당시에는 왕성했는데 예수님이 일어나 세태가 바뀝니다.  그러니 요한의 마음속에 의심이 들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전해라’하시며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말씀하십니다. 요한이 흔들리면서 의심하게 되고 다른 일로 잡혀서 순교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파할 때 또 다른 참이 나타나면 우리는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세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거짓이 있고 참된 역사도 있는데, 다른 참이 나타나면서 내 역사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참은 참끼리 알아보니까 참끼리 이동을 합니다. 당연히 요한의 사람들은 줄어들고 요한은 ‘내 사역은 끝났다보다’ 당황됩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이 3년도 안되었지만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6장223절강해

누가복음6장 223절   그 분에 대하여, 이 말이 온 유대와 모든 사방에 나갔습니다. 누가복음 223절 말씀입니다. ‘그 분에 대하여’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었는데, 그 분의 소문, 즉 예수님에 대하여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모든 기적이 일어날 때 기적 대상의 내용에 가면 안 되고, 모든 기적의 내용은 예수님께 가야 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간증을 할 때 항상 ‘예수님에 대하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이’ 앞 구절에서 ‘큰 선지자가 우리에게 일어나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말입니다.  큰 선지자가 나타났고 백성을 돌보셨다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진리는 전파되는데 시대가 지나가도 진리는 항상 하나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그 말이 진리였고 앞으로도 가능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전파해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전파할 내용은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교회와 목사와 전도사를 자랑합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이 나타났어’ 자랑하고 전합니다.  이것은 양념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예수님만 전파해야 합니다.  이 원리에 벗어나면 미혹됩니다. 교회본질은 인간이 아닙니다.  교회머리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가 동반되어 나가야 합니다.  잘못하면 목회자나 장로가 머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오직 예수님과 말씀만 전파해야 합니다.  교회나 목사, 간증을 전파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 말이 온 유대와 모든 사방에 나갔습니다.’ 온 유대는 인근지역입니다.  이것이 바른 전파입니다.  제가 유튜브에 말씀을 전파하는데 헬라어 원어 각 구절을 전파합니다.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서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자체가 진리의 말씀이지, 제가 부연 설명하는 것은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6장222절강해

누가복음6장 222절   그러자 두려움이 모든 자들을 잡았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는데, 말하길,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으며, 또한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누가복음 222절 말씀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관에 있는 청년을 일어나라 명령하시고, 청년이 일어나 앉아 말하고, 그 청년의 손을 잡아 어머니에게 인도하자입니다.  ‘두려움이 모든 자들을 잡았으며’ 이 두려움은 무서운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면 우리는 경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면 누구든지 경건하게 됩니다. 이 경건함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증거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하면 우리는 보통 환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진짜 나타나면 경건해지고 숙연해집니다.  장례식가면 전부 다 엄숙하게 경건해집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도 사람은 경건해지는데, 죽은 자가 살아나고 지옥 갈 사람이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때 얼마나 우리가 경건해질까요? 이 경건함과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 ‘모든 자들을 잡았으며’ 관을 메고 있는 사람들, 장례행렬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과부 등 거기 현장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기에 경건함에 쌓인 겁니다.  또 살아갈 때도 경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세상 적으로 살고 제 멋대로 살아갑니다.  가정에 큰 어른이 있으면 밑에 있는 사람들은 행동과 말을 조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나타난 증거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조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행동이나 말이 조심하게 됩니다.   어떤 성도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방에 혼자 있는데 자꾸 예수님이 보시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경건이고 두려움입니다.  환상으로 보는 것도 아닌데 의식가운데 예수님이 보시는 것을 느끼는 마음이 듭니다.  이것이 두려움인데 무서움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 같은 마음이 드니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의 경건함은 성령의 역사가나타난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