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6장213절강해

 누가복음 6장213절

 

그러자 그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가셨습니다. 이미 그 분이 집에서 멀리 계시지 않았는데, 백부장이 그 분에게 친구들을 보내었으며, 말하길, “주님! 고생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제 집 아래 들어오시는 것을 제가 감당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 자신도 당신에게 가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13절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들과 함께’ 예수님께 유대장로들이 와서 백부장의 종이 아프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셨습니다’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는 겁니다. 

‘이미 그 분이 집에서 멀리 계시지 않았는데’ 멀리 집이 보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5리, 10리가 일반 길입니다. 

5리는 가깝다고 말하며 2킬로 정도 거리입니다. 

‘백부장이 그 분에게 친구들을 보내었으며’ 백부장이 사람을 또 보냅니다. 

유대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는데 이제는 집에 와 있는 친구들을 보냅니다. 

인간관계가 참 좋습니다.


‘말하길, “주님! 고생하지 마십시오.’ 

5리 정도 되었을 텐데 이 정도는 고생할 거리는 아닙니다. 

‘당신이 제 집 아래 들어오시는 것을 제가 감당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걷는 것이 고생이 아니라,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고생이라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영적인 세계를 뭔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안 좋은 사람을 만나면 수준이 안 맞아서 힘이 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수준이 안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힘들어 하시고,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버리고 나가십니다. 

백부장도 이것을 알고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내가 수준이 떨어져서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 안에 들어올 때 자신이 죄가 많기에 예수님이 너무 힘들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상황을 정확히 깨달은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셨을 때 예수님께 자기에게서 나가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놀라우신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반대의 현상이 됩니다. 

‘나는 기뻐요’가 아니라 ‘하나님 나에게 오지 마세요’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세리도 저 끝에서 고개를 감히 들지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도저히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자임

을 깨닫게 됩니다. 

백부장은 영적수준이 높습니다. 

세레요한도 예수님의 신발끈도 감당 못할 자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환영하고 모셔 들입니다, 

불같이 오시옵소서’ 하는 말들은 미혹입니다. 모셔들인다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높은 분이기에 내려 올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내려오시면 고생이라고 영적으로 느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계실 때 참 힘들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반역하고 배반하고 근심시켜드리고 항상 믿음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은 항상 연약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면 행복하고 편한 게 아니라 고통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말도 못 꺼낼 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맞먹지 마십시오. 

미혹입니다. 

말 한마디도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주여!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눈물로 나아갑니다. 

참신앙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너무 부끄럽고 한심하며 가슴을 치는 것이 참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 어려운 겁니다. 

그게 신앙이며 공경심입니다. 

할아버지나 부모가 어려운 겁니다. 

만만하게 보는 것은 잘못된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도 겁납니다. 


예수님을 맞먹고, ‘성령님 안녕하세요’하며 성령님을 친구처럼 대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며 미혹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곧 지존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어려운 분인지 모릅니다. 

가장높은 성소가 지성소입니다. 

너무나 거룩하고 높기에, 이름도 부르기 어려운 분이며 늘 경건해야 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존재 앞에 느끼는 우리 인간의 영적 감성입니다. 

경건이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안하무인입니다.

강단에 성전에서 댄스하고 노래하고 세속적인 춤추고... 요즘 교회 실태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데 교회 와서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하나님께 무서움을 느끼는 것이 경외심입니다. 일제 기독교인들은 항상 경건하고 정숙하고 모든태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공연장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엎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보지를 못하니까 그런 겁니다. 

‘목사님! 말씀 은혜로웠습니다’하고 끝냅니다. 지금은 경건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백부장이 왜 위대한 사람일까요? 

백부장의 집은 회당까지 지을 정도라 화려했을 것입니다. 

그런 집에 예수님이 오심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나을 것을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지금 백부장은 경건한 가운데 있기에 예수님을

감히 볼 수 없다는 그런 두려움과 영적인 의식이 깨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저 자신도 당신에게 가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나도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왜 보냈느냐? 

감히 예수님을못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기에 두렵습니다. 

감히 못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절 만나주세요’ 이것은 간이 부은 것입니다. 

예배는 말씀과 찬양도 아니며 기도도 아니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배장소가 두렵습니다. 

교회갈 때마다 하나님계신 곳이기에 회개하며 갑니다. 

그런데 ‘교회 갈 시간이야’하며 그냥 가서 앉아 있다가 옵니다.


하나님 만나러 가면 두렵습니다. 

긴장됩니다. 

교회 가는 것은 편하게 친구 만나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

‘반대로, 말씀을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소원은 있습니다. 

종이 나아야 됩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못 나가니까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정말 진실된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꼭 손을 얹고 안수하고, 부둥켜안고 울고, 안찰하는 것만으로 치료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만으로 치료된다는 신앙이 바로 중보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중보기도하면 낫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중보의 세계를 배워야 합니다. 

중보를 통해 예수님은 낫게 하십니다. 

신유의 능력으로 안수를 안할 지라도 얼마든지 병은 중보로 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중보자가 되어야합니다. 

중보의 은혜를 지금 베푸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해결되고 낫고 귀신이 나가는 겁니다. 

백부장은 이 진리를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의 말씀이기에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저도 말로 기도하고 말로 치료합니다. 

우리 입술의 권세로 기도하고 낫는 겁니다. 

우리말에 권세가 있고 중보의 권세가 있습니다. 백부장의 ‘말씀만 하옵소서’ 중보로 예수님이 밖에서 치료를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감각적이거나 찌릿찌릿 하지 않습니다. 

느끼고 보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는 안보고 안느껴도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신앙이 진짜입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낫겠습니다.’ 

얼마나 큰 중보의 신앙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낫는 겁니다. 

죽을 고통가운데 있는 종을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 합니다. 

나을 거라는 확신합니다. 

놀라운 신앙입니다. 

우리가 중보 기도할 때 어떤 문제를 위해 기도할 때 성막에 금향로가 있는데 금향단에서 기도하면 향이 올라갑니다.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향단에 있는 응답의 향단에서 응답으로 떨어집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뜨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가 응답받습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금향단이 있습니다. 

향단에서 기도할때 기도의 향이 올라가서 응답으로 쏟아 부어지는데 이것이 중보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중보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낫게 하시고, 회복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현상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응답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루어지고 고쳐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백부장의 신앙을 본받아서 하나님 앞에 진실된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예수님이 내 눈에 안보이고 안수가 없다 할지라도 백부장은 집에 혼자 있고 장로들과 친구들을 보낸 상태에서 지금 기도합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놀랍게도 응답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인 것에서 떠나야 됩니다. 신앙은 안보이는데 귀신이 떠나갑니다. 

안 보이는데 병이 낫습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감각신앙은 어린 아이 신앙입니다. 

내가 느끼지 않더라도 병이 나을 것을 믿습니다. 

귀신이 나갈 때 소리 지르는 것은 영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낫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십계명을 어기면지옥갑니다!

  micl315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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