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6장251절강해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누가복음 251절

 

그가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들이 사해졌다.”

 누가복음 251절 말씀입니다.

‘그가’ 예수님입니다.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눈물로 적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죄 많은 여자입니다. 

‘네 죄들이 사해졌다’ 

눈물로 죄를 회개하니 예수님이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신 겁니다. 

죄들이 사해진다? 

그런데 이 여자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을 때 죄가 사해진 것이 아닙니까? 

막 회개할 때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죄사함이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 죄를 사해달라고 한다고 죄가 사해질까요? 

사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는 다 회개합니다. 

그런데 죄사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유명한 목사님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하라고 지적했습니다. 

회개를 대부분 다 하셨겠지만,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은 딱 두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가짜 회개를 하였을 것입니다.

 죄를 사함받는데 실패한 회개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눈물로 회개를 하는데 용서받지 못하고 죄사함 받지 못할까요? 

난 눈물로 분명히 간절히 기도했는데요? 

그 이유가 오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사함 받고 어떤 사람은 사함 받지 못합니다. 

눈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죄사함이 눈물로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정말로 돌아서는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씻으면 용서 받는다는 희망이 다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다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은 회개가 동반되지 않으면 죄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은 제목이 죄사함입니다. 

죄사함의 조건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를 말합니다. 

여기 등장된 이 여인은 과거 많은 죄를 지었을 겁니다. 

하지만 죄에서 완전히 돌아선 상태의 회개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살인죄를 지어서 눈물로 회개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살인죄를 짓지 않는 단계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를 미워하다가 ‘용서해주세요’ 

한다고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간음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죄를 지으면서 ‘용서해주세요’ 한다고 용서가 안됩니다. 

고해성사도 미혹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사함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변화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최소한 십계명을 준수할 때까지의 변화를 말합니다. 

십계명 준수할 때까지의 눈물은 죄사함을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죄사함의 선포가 안됩니다. 죄사함은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사함은 눈물로는 안됩니다. 

믿음은 정말 죄에서 통과한 믿음을 말합니다. 울어도 안되고 애쓰도 안되고 정말 죄에서 돌아서야 됩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죄사함의 조건입니다. 

‘내가 그 때 회개 많이 했어, 많이 울었어, 용서받았어’ 하지만 실제로는 용서가 안되어 있습니다. 

‘네 죄들이 사해졌다’ 선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여전히 죄를 짓는데 무슨 죄사함이 일어납니까?

 

감방에 들어간 사람이 거듭남으로 풀어졌지만 죄를 지으면서 나는 감방 안가고 천국 간다고 착각하고 사는 겁니다. 

하지만 죄를 지었기에 감방 갑니다. 

죄가 있는 한 구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탐심이 가득하며 돈에 욕심 부리는 목사가 변화의 회개를 하지 않고 죄가 사해지지 않으면 감방 가는 겁니다. 

하지만 죄가 사해지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천국 간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오직 믿음으로, 속죄의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죄가 사해지면 실제 죄를 안지어야 됩니다. 

그리고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성결조건입니다. 

그 위에 속죄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죄가 사해지지 않았고 돌아서지 않았지만 속죄만 주장합니다. 

이것은 미혹입니다.

 

저희교회가 주장하는 구원관 내용을 이해 못합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구절만 보고 앞에 내용을 안봐서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를 거친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데,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이론만 가지고 있는 겁니다. 

다 지옥 갑니다. 

개신교의 뿌리는 바울서신을 기초하고 더 나아가 바울서신을 신학으로 정립한 칼빈의 이론을 기초합니다. 

그래서 잘못되었습니다. 

카톨릭은 어거스틴의 신학위해 기초해서 세운 건데 이론들이 잘못되었어요. 

동방정교회도 어거스틴의 이론을 기초로 많이 하지만 뿌리가 잘못되어 성결부분이 약합니다. 

마치 구원받은 다음에 성결의 과정이 있는 것처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제일 뒤에 있는 거고 성결이 먼저 있어야 되는데 거꾸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교회는 개신교가 아닙니다. 

구원이 거듭남을 조건으로 합니다. 

거듭날 때부터 죄를 사함 받을 수 있고 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죄사함은 아닙니다.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10계명을 준수하는 광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요단강이 나오는데 바로 진짜 죄사함입니다. 

물론 그 전에 죄사함이 아니더라도 울어야 됩니다. 

하지만 요단강에서 죄사함의 선포가 일어나는 겁니다. 

죄에서 돌아서는 광야의 수많은 열정과 고통으로 이루어 낸 다음 맨 마지막에 천국에 들어가는 죄사함이 요단강에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죄사함을 선포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나병을 씻었습니다. 아마 이제까지 지은 모든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7번입니다. 

죄에서 돌아서는 죄사함의 회개가 아니라 눈물만 흘리는 회개는 미혹입니다. 

‘나 예수 믿어, 나 구원받았어’ 미혹입니다. ‘난 눈물로 용서받았어’ 이것도 미혹이며 회개가 아닙니다. 

실제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회개가 전제가 된 눈물의 죄사함이  죄사함의 선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계속 예수 안에서도 마음의 죄를 울며 회개 기도합니다. 

이미 행위죄는 끝난 겁니다. 

더 이상 행위죄를 지으면 안되는데 행위죄를 지으면 아직 광야에 있는 겁니다. 

거듭날 뿐이고 아직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이수해야 합니다. 

이수하면 가나안 땅은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고 속죄가 적용되는 때입니다. 

이때도 죄를 짓습니다. 

이때는 속죄 아래 죄가 은폐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두움에 있는데 가나안 땅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미혹됩니다. 

이 여자가 단순히 죄를 씻었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가 동반되었기에 죄사함의 선포가 일어난 사실입니다. 

누가복음의 스토리를 보시다보면 이 이론에 동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짓는 사람을 보고 선포하신 적 없습니다. 

세례요한도 군병들이 왔을 때 ‘토색하지 말라’합니다. 

그리고 토색하지 않을 때 세례를 줍니다. 

토색하지 않을 때 죄사함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토색이라는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가 아직 남아 있다? 

구원이 안 일어납니다. 

여전히 음란하면 구원 못 받습니다. 

죄를 버리고 십자가 보혈로 사함 받아야 천국에 들어가기에, 죄와 천국은 처음부터 양립이 안됩니다.

 

천국은 죄인은 못 들어가고 의인만 들어갑니다. 이 여자도 왕년에는 행위죄를 많이 짓고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안합니다. 

여전히 죄를 짓고 돌아다니는데 누가 죄사함을 선포하겠습니까? 

남들은 과거를 보지 현재를 보지 못합니다. 

신앙은 오늘이 중요합니다. 

오늘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오늘 죄를 벗어버렸습니까? 

그러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과거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돌아서는 회개를 하면 더 이상 예수님은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에서 지워졌습니다. 

그래서 ‘새사람이 되었도다’입니다. 

완전 고장 난 차가 폐차가 되었지만 다 수리해서 싹 고쳐 새 차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으면 새것이 됩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도 몸도 다 더러워집니다. 

아주 흉물스러워집니다. 

우리가 새 차가 되면 예수님이 타고 다니시며 함께 하십니다. 

그 전에 똥차였을 때는 타시지 않습니다. 

그런 차는 마귀가 탑니다. 

새 차는 나와 동행하시며 함께 하십니다. 

죄가 있으면 예수님이 못 타십니다.

 

우리가 죄를 다 사함 받으려면 마태복음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을 통과해야 들어옵니다. 마태복음에서 계명순종이 다 이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누가복음에 들어오면 자신이 된 줄 압니다. 

마태복음에서 계명순종하고, 마태복음 들어오기 전에는 먼저 구약이 들어와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대인죄가 주로 적혀 있습니다. 

대신죄는 구약에 쓰여 있습니다. 

구약을 잘 통과해야만 대신죄가 사라집니다. 

하나님께 인간은 죄를 짓고 살지만 모르고 삽니다. 

구약에 대신죄가 잘 쓰여 있기에 그것을 잘 통과하고 마태복음은 다 대인죄이며 이것을 통과해야만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그 눈물을 받아주십니다. 

대신죄를 지으면서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은 안 받으십니다. 

대신죄를 통과하고 대인죄를 통과하고 그래야 구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제 이야기와 일반이야기를 합니다. 누가복음은 우리교회 성도분들 이야기합니다.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로 지명해서 어떻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가복음은 또 다른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자꾸 마음판에 있는 죄를 지적하니 어려운 겁니다. 

그런데 통과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죄까지 지적 받고 다 도려내어 상쇄되고 없어져야 됩니다. 

본인이 가지고 싶은 본성이지만 죄라 어쩔 수 없이 다 뒤집어내니 기분이 좋을까요? 

나쁩니다. 

마지막 가지고 있는 것을 까서 벌리고 제거할 때 사람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태복음에 은혜 받고 오시면 제가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죄를 다 지적합니다.

 

우리의 폐부와 내장이 눈에 안보입니다. 

여러 기계를 통해 찍어서 진단받아서 잘못된 것을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암덩어리를 막판에 제거합니다. 

이 암덩어리가 자아입니다. 

인간의 맨 막판에 자아가 있습니다. 

손가락질 당하는 이 여인이 군중 앞에서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을 때 자아가 없는 겁니다. 누가 나를 비난하는 것 신경 안씁니다. 

자아는 우리를 점잖게 만듭니다. 

공손하고 예의 바릅니다. 

하지만 자아가 세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없으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맨 마지막의 자아가 무너짐을 통해 우리가 죄인에서 의로 새롭게 탄생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수많은 눈총을 뚫고 갈 때나 눈물로 적신 머리털로 예수님 발을 씻을 때, 자아가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의식할 수 있습니다.

 

자아가 무너지면 누구 눈치 안봅니다. 

오직 눈앞에 예수님밖에 안보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예수님 앞에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전부가 되십니다. 

자아가 살아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추구하십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아입니다. 

자신의 도덕, 의가 무너져야만 진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겁니다. 

마음껏 따라갈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외에 원하는 것이 있고 따라가는 것이 무너져야 됩니다. 

따라가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라 눈에 안보입니다. 

내 자아가 완전히 무너져야 자유를 누리며 편안합니다.

 

우리 신앙세계는 은혜충만하면 배꼽잡고 웃습니다. 재미가 넘쳐납니다. 

반대로 자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우울하고 머리 생각이 골몰해지고 복잡해집니다. 

자아가 무너지면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자아가 무너지는 것이 마지막 작업입니다. 

무너지면 다른 게 안보이고 예수님만 보입니다. 예수님의 발이 시몬이 물을 주지 않아 더럽습니다. 

그런데 머리털로 씻고 입 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고 은혜에 감사해서 이제는 헌신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누구를 의식하고, 누구 말을 의식하고, 이런 것은 아직 자아가 안 깨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더 무서워해야 되는데 누구를 의식합니까? 

자아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하나님만 의식합니다. 

인간이 무섭습니까? 

하나님이 무섭습니까?

 자아가 깨지면 하나님만 무섭고 세상 무서울 것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히 자아가 깨어지고 완전히 변화되어 용서받고 죄사함 받으면 새로운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연애을 하든 큰 집을 사든 여행을 하든 권력을 잡든지 세상 행복은 그 때뿐입니다. 

하나님이 진짜입니다. 

하나님을 얻으면 원하는 게 없어집니다. 

이 진짜를 얻으면 아무 행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1조가 있는데 백만원이 부럽겠습니까?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소유하면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얻은 것입니다. 

더 이상 소원과 원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저희 교회는 소원구하는 것 자체를 이단시합니다. 

하나님을 못 얻으면 소원구합니다. 

오직 성령을 구할 수는 있습니다.

은혜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구원 얻으면 구하는 게 없어집니다. 

천국은 다이아몬드, 벽옥이며 순금인데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얻는 것이 구원인데 구원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것이 사라지고 만족이 옵니다. 만족은 어둠에 대한 댓가입니다. 

만족은 지금 좋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만족이 옵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보이시만 나의 구원자 되실 때 만족이 오는 겁니다. 

진정된 구원속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선물들, 은사들, 영적인 경험들, 육체적인 것들 다 진짜가 아니고, 딱 한 가지 하나님입니다. 

그게 선물이고 복입니다. 

하나님을 원해야 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하나님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십니다. 

원하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은 구원이 안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얻으면 가나안 땅,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며 그러면 인생 끝나는 것이고 천국 가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모형에 갈마름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어야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에서 다른 원함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함이 복입니다. 

하나님을 얻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면 누구와 결혼하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행복합니다.

 

드디어 이 여자가 이 과정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죄사함 받았다고 예수님이 선포하십니다. 
‘내가 받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똑같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되고 이 여자가 겪던 행복 속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십계명을 어기면지옥갑니다!
  micl315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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