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6장288절강해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누가복음 288절

 

그러자 그들은 된 일을 보려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왔는데, 귀신들이 나갔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발 곁에서 옷 입고 정신 차려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두려워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88절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된 일을 보려고 나왔습니다’ 

귀신이 돼지에게로 쫓겨나가니까 돼지들이 죽습니다. 

돼지를 몰던 자들이 도망가서 성과 동네에 들어가 그 일들을 전합니다. 

들은 사람들은 궁금합니다. 

예수님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나간 사람은 어찌되었나, 여러 가지가 궁금해서 나아왔습니다.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 어떻게 이야기 하나, 저 사람 어떻게 다른가 보자’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오는데 이런 사람들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다 전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도하면서 예수님을 안 전하고 목사님을 전하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보지 않고 현상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전도하려면 사건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교회머리는 목사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나 찬양인도자도 아닌 행사도 복지도 아닙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말하면 그것을 보러 옵니다. 

구경꾼을 만들어버립니다. 

크리스마스 콘서트도 제가 주인공이 아니며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하는 것입니다.

 초청하는 것도 구경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논란이 되는 현상적인 내용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왔는데’ 예수님께로 왔긴 왔습니다. 

돼지들도 죽어서 물위에 떠다니고 있고, 제자들도 있고, 군대 귀신들린 사람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귀신들이 나갔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발 곁에서’ 예수님의 곁에서가 아닌 발 곁에서입니다. 이런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제가 안수할 때도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니가 내 발 옆에 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발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겸손한 가운데, 예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태양처럼 밝게 빛납니다. 

때론 예수님이 손으로 우리를 만지시는데 그 만지시는 손을 직접 만지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기에 교회가 예수님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크시기에 교회가 예수님을 담을 수가 없어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예수님의 발 곁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크고 놀라운 분이시기에 예수님을 다 만질 수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발 곁에 우리는 서 있을 뿐입니다. 

바로 참교회만이 예수님의 발 곁에 서 있습니다. 

참된 구원자의 삶은 예수님의 발곁에 서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발로 마귀를 밟아 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 곁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는 겁니다. 

왕의 보좌 발밑에 계단이 있으면 신하들이 서 있습니다. 

왕의 권세아래 있는 겁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귀신의 권세아래 있었지만 귀신이 나감으로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발 곁에 내려온 겁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축사가 일어나면 바뀌어져서 우리는 예수님의 발 곁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권세아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며 모시는 종에 불과합니다. 

구원은 체험이나 경험이나 깨달음이나 결단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아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권세아래 있습니까? 

예수님의 주장아래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의 삶과 마음을 주장하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계획을 주장하십니까?

 안한다고요? 

예수님의 발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이 나가면 ‘병이 치료되었어, 행복해졌어’ 웃기지 마세요. 

다 가짜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면 예수님의 권세아래 있게 됩니다. 

그 분의 통치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드디어 날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위해 살게 됩니까? 

자기를 위해서 사역하고, 계획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신하가 누구를 위해 삽니까? 

왕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왕 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가 왕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면 예수님이 왕이 아니라 그냥 친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 권세아래 있어야 합니다. 

목사로서 활동하고 노회활동하지만 예수님이 가운데 없는 것은 기관이나 모임이지, 예수님이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 조종되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귀신에게 조종되어 살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조정하셔야 합니다. 

통치의 변화가 구원입니다. 

나를 누가 주장하느냐 입니다. 

내가 돈을 왜 버느냐? 

돈을 어디에 쓰느냐? 

삶을 왜 사느냐? 

누구를 왜 만나느냐? 

어디를 왜 가느냐? 

과거에는 귀신에 의해 활동하며 살았습니다. 

귀신은 나를 위해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 사는 모드로 바뀌어 살아갑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발밑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 아래 서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말아라하면 안합니다. 

구원은 통치의 변화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알고 은혜를 받아도 통치가 안 바뀌면 구원 못 받은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를 적게 받아도 삶의 이유가 바뀌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예수님의 명령가운데, 예수님의 은혜가운데 있습니까? 

진정 예수님을 마음으로 섬깁니까? 

내가 왕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왕이면 귀신이 가득한 겁니다. 

모든 마귀들은 나를 왕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 곁에 있으면 내가 왕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종의 자세가 은혜가운데 있는 겁니다. 

은혜는 뭐가 들리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권세와 그 뜻 아래 있는 겁니다.

 

드디어 그 사람이 ‘예수님의 발 곁에서 옷 입고 정신 차려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영의 세계에서 옷을 벗는 것은 죄를 말합니다. 

귀신들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영의 세계에서 미친 행동이 아니라 옷을 벗고 다닙니다. 

이 지구상에 군대 귀신들린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나체가 가득합니다.  

영적으로 옷을 벗고 있으면 귀신이 가득한 것입니다. 

환상가운데 다 보입니다. 

죄를 지으면 벗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라오디아교회에 ‘너희가 옷을 벗었음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영적세계에서는 다 옷이 있습니다. 

라오디아 교회는 죄를 지어서 헐벗었는데 모릅니다. 

말씀 잘 듣고, 기도 많이 하니까, 

예배 잘 드리니까 구원받은 줄 압니다.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귀신은 죄를 짓게 만듭니다. 

벌거벗게 만듭니다. 

귀신은 다 벌거벗게 만들어버립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가 귀신 때문입니다. 

야동이나 간음죄 등 죄들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귀신 때문입니다. 

죄를 끊어야 천국 가는데 죄를 못 끊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하며 성경구절 가져다 붙이면서 뻔지르하게 말합니다. 

‘은혜’라 외치며 변명합니다. 

죄를 못 끊고 옷을 벗고 다니면서 자신은 목사, 전도사, 은사자 라고 합니다. 

미국기독교는 문화 때문에 기독교가 살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죄를 당연시 합니다. 

죄가 일상입니다. 

이혼, 재혼, 간음, 동성애, 이성애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문화 속에 있던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제일 깨끗한 저희 교회 오면 힘들어도 죄악의 때들이 벗겨져 바뀌는 과정을 싹 거쳐야 합니다. 천국가기 위한 이 과정이 멉니다. 

구원이 빨라야 1년입니다. 

구원받는 과정에서 죄가, 죄의 사슬들이 다 벗겨져야 합니다. 

모든 사상들이 깨어져야 합니다. 

깨어져 온전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변하면 옷을 다시 입는 겁니다.

 

‘정신 차려 앉았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어둠이 많으면 정신이 딴 데 갑니다. 

놀러다니고, 구경하러 다니고, 쇼핑하고, 사람들 만나고 먹는 것, 성적 만족 등 온통 정신이 딴 데 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으면 예수님께 가 있습니다. 

말씀에, 죄사함에 갑니다. 

정신이 안 좋으면 엄한 생각, 이상한 생각하고 삽니다. 

은혜로운 생각하면 은혜의 세계로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생각이 건전해집니다. 

학생이 영화, 인터넷과 게임을 즐겨하면 은혜의 세계로 못 들어옵니다. 

파주에서 오시는 분의 막내가 왔는데 하나님이 ‘니가 회개를 하루 30분씩 3년하면 내가 너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이 학생은 다른 학생처럼 마음이 야망이나 게임, 즐기고 노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말씀에 가 있으니 하나님이 축복을 예비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공부나 세상에 가 있지 않고 말씀에 가 있으면 우리 정신세계가 맑아집니다. 건전해지고 온전해집니다. 

세속적이고 인본주의로 가는 것은 하나님이 마음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아빠, 엄마, 형제, 자식, 남편, 아내, 이성 등 온통 이 세상에 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 있어야 온전케 됩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중심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정신이 온전해집니다. 

사람은 인본으로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머리에, 내 마음가운데 있어야 행복해집니다. 

그래야 정신이 맑아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으면 다 정신이 이상해지고 맛이 갑니다. 

온전케 됨은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길 때 내 정신이 온전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는 겁니다. 

내 생각이 영의 생각으로 되어야 온전한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육의 생각은 혼미한 생각입니다. 

무엇을 먹고 살까,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번성할까 다 육의 생각들입니다. 영의 생각은 어떻게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까? 

얼마나 헌금을 드릴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으로 치환됩니다. 

이것이 정신이 온전한, 온전한 생각입니다.

 

‘두려워하였습니다’ 

능력자 예수님을 보았으면 경배하여야 하는데 신기한 능력을 가진 자로 보며 거꾸로 무서워하며 경계하는 두려움입니다. 

참된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신세계가 가지고 있는 맹점입니다. ‘쟤 뭐야?’ 경계를 하는 것입니다. 

저희교회가 많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저 교회 뭐야?’ 은혜세계에 대한 반대, 안티적인 생각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귀입니다. 

앞으로 예언과 통변이 강한 분들이 우리 교회 많이 온다고 하십니다. 

물론 대부분 다 가짜들입니다. 

처음에는 뭐야 두려워하다가 나중에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오면 하나로 동화되어야 하는데 놀라고 무서워서 뛰쳐나가버립니다.

 

한 명이 구원 안에 들어가서 온전케 되었으면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해야 되는데 일단 경계하고 도망 가버립니다. 

성령의 역사가 오면 회개가 터지고 은혜가 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오면 은혜가운데 들어가 은혜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거리를 두면 절대 은혜가 안옵니다. 

은혜에 마음을 열려야 합니다. 

 마음에 사모함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은혜 받아서 의 가운데 들어가면 좋은 겁니다. 

이런 역사를 두려워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올 때부터 안 좋았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들과 온전한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보고 가버립니다. 

이것이 불신지역의 현상이고 마귀역사 지역의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잘 못 받아줍니다.

 

사람들의 캐롤문화는 ccm보다 더 추락해서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놀이로 보입니다. 

부르는 사람들이 인본적으로 그렇게 부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캐롤을 부르는 이유가 제가 부르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전달자의 중요성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보고 성경을 연구해도 전달자가 은혜를 주지 못하면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찬양도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저도 똑같이 성경을 전달하고 찬송을 부르면 은혜가 마음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중요합니다. 

똑같은 성경, 똑같은 찬양이라도 누가 전하고 부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전달자에 의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에 선지자가 중요합니다. 

전달자에 따라 내용이 바뀌고 교회에서 구원의 여부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하고 싱어가 중요합니다.

 

캐롤도 미국문화는 그냥 노래로 부르지만, 저는 찬양으로 부릅니다. 

같은 노래인데 느낌이 다릅니다. 

같은 물건인데 다릅니다. 

성령의 은혜가운데 들어가면 다른 겁니다. 

똑같은 장면인데, 현상은 같은데 결과가 다릅니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은혜로 들어오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안 들어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역사에 확 들어가십시오. 

경건된 두려움으로 바뀌십시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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