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6장327절강해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누가복음 327절

 

그 분이 다섯 개 빵과 두 마리 물고기를 가지고, 하늘로 올려 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셨으며, 떼셨으며, 군중에게 차려놓도록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327절 말씀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다섯 개 빵과 두 마리 물고기를 가지고’ 이 표현은 우리식 표현이며, 영어식은 빵 5개,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이것을 받아서 가지고 갑니다. 

어린 소년이 드리는 것을 제자들이 받아서 예수님께 드립니다.

 이 음식을 통이나 바구니에 드렸을 것입니다. ‘하늘로 올려 보시고’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바닥에 엎드리어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얼굴을 올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셨습니다. 

앞에는 3만 명이 앉아 있고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3일 동안 부흥회 집회를 인도하신 인도자이며 말씀 전파자며 부흥사이며 복음전파자입니다. 

전파자가 바구니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배가 엄청 고픈 사람들은 목회자가 빵 몇 개를 들고 기도하니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축복하셨으며’ 대상이 제자나 군중이 아닌 가져온 음식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원래 축복이라는 단어는 인격이 붙습니다. 

사람을 축복하며, 또한 하나님을 축복하는데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은 경배하고 찬양을 합니다. ‘그것들을’ 뜻은 일용할 양식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과정에서 좀 간당간당하더라도 쪽박을 매거나 노숙자로 살지 아니하며 어떻게 살아가느냐? 

직업도 좋지 않은데 어떻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을까요? 

그것은 일용할 양식의 축복이 지금도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부도가 나고 쫓겨나고 많은 위기가 있는 상황일지라도 복이 채워지는 비결은 지금도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축복하시는 이 장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요즘도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축복받고 살 수 있느냐? 

일용할 양식의 복을 받고 사느냐?

 지금도 똑같이 수만 명의 유형교회 성도들을 향해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떡상이 되어주셔서 공급하는 공급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12제자에 대한 공급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 예배드리면서 헌금드릴 때, 헌금을 앞에 놓고 헌금기도를 제가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항상 축복이 옵니다. 

헌금 앞에 서 있는 모든 성도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헌금을 많이 했건 적게 했건 우리 교회 모인 성도들은 말씀의 꼴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자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3일 동안 집회를 여셨습니다. 

헌금은 오병이어 딱 한 개뿐입니다. 

어른들이 다 가난해서 금화 은화 드린 것도 아니고 헌금 드린 것은 어린 소년의 오병이어 뿐입니다. 

이 헌금이라도 예수님은 축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배 마다 헌금 기도 할 때 바로 이 장면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할 때마다 감동이 임하고 축복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축복일까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에게 물질과 건강과 형통의 축복이 나갑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을 귀중히 여겨야 됩니다. 

우리가 없어서 못 드려도 한 소년이 드린 작은 것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이에게 일용할 양식의 축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일용할 양식 빵과 물고기를 공급받습니다. 

우리가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기본 생활권의 복을 의미합니다.

 예배 때마다 헌금앞에 드린 기도가 건강과 물질의 복과 형통의 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떼셨으며’ 바구니에서 꺼내어 나누어주었다 는 의미입니다.

 ‘군중에게 차려놓도록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군중에게 주도록, 곧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목회자가 예수님께 받아서 성도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제자들은 심부름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축복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을 제자들이 나누어준 것뿐입니다. 

헌금 앞에 기도할 때 예수님이 축복하신 것을 제자들이 심부름으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축복권이 없습니다. 

구약에 제사장들이 있었는데요? 

제사장들도 예수님이 주신 것을 나누어 준 것뿐입니다. 

축복권은 예수님만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멜기세덱 즉 예수님이 축복한 겁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드린 십일조, 구제헌금, 감사헌금, 특별헌금을 하나님이 축복해주십니다. 목회자는 예수님의 축복을 대신 대언할 뿐입니다. 

헌금이 들어올 때 저는 전화로 통변기도를 드립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이 축복을 많이 주시는 경우를 봅니다. 

저는 중간에 엠프이며 스피커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예배, 모든 헌금에 대해 축복을 주시는 장면이 이 오병이어 축복기도 장면입니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참교회를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일용할 양식과 삶에 대한 보장들이 나가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성부하나님께 중보기도 해주십니다.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영혼들을 참된 성도를 위해 중보로 기도해주시는데 양식을 기도해주십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다 잘사는 겁니다. 

유복하게 잘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린다는 사실입니다. 

중동은 모래바람에 삶의 질이 형편없습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지역 쪽은 모슬림 국가입니다.

 힌두교인 인도는 열사와 황사와 악취가 있습니다. 

불교국가인 동남아도 시원치 않습니다. 

축복이 오지 않습니다.

 기독교인 미국 캐나다 유럽 뉴질랜드 등은 여유 있고 풍요롭고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전도하면서 돈을 3백 주느니 예수님을 믿게 하면 예수님이 그의 공급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분들이 무료급식을 하지만 진짜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게 낫습니다. 

육의 양식 공급은 먹다가 결국 지옥 갑니다.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오병이어를 공급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고쳐줄게’ 하며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믿게 되면 예수님이 치료해주십니다. 

제자들이 군중을 인도하면, 예수님이 먹을 것을 주시고 치료해주시고 복을 주시는 겁니다. 돈 몇 푼 주어봤자 별 표도 안납니다. 

구제헌금으로 드리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해 구제하십니다. 

초대교인들이 잘 살은 이유가 그 많은 물질을 나누어서 서로 공유하면서 유복함을 누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교회성도는 지체입니다. 

가난한 자가 있으면 안됩니다. 

부족한 자에게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목사가 교회 돈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사용해야 되는데 건물을 짓고 땅투기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교회돈은 성도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대상은 3만 명 군중입니다. 

교회돈은 성도들에게 다 가야 합니다. 

모두에게 골고루 가야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더 배분됩니다. 모두에게 배분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누가 독보적으로 잘날 것도 없고 다 같이 잘 살아야 합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인도할 때 3백만 명이 같이 먹고 살았습니다. 

살면서 내가 잘 살고 못 살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 살고 부흥하고자 하는 욕망은 필요 없습니다. 

천국가기만 하면 됩니다. 

목사들이 부흥을 꿈꾸는 이유도 다 돈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 시작할 때 ‘하나님 1년에 한 명 주세요,

 12명을 제자로 삼고 싶습니다’ 기도했었습니다. 

이게 제 꿈이고 비전이었습니다. 

목회는 내게 일용할 양식의 수단이 되면 안됩니다. 

그럼 뭐먹고 사나요?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우리 마인드가 목회를 통해 영광을 얻고 누리고자 하는 것은 미혹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내가 어필되는 이런 것은 영광입니다. 

목회는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군중들에게 가져다주라고 떡과 물고기를 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받아서 자기 혼자 저기 가서 먹고 있습니다. 

미친놈이죠?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역할입니다. 

목회자가 한명이라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많은 수의 부흥을 꿈꾸고 사역을 꿈꾸는 것은 미혹입니다. 

목회자가 목표를 세우거나 영광을 꿈꾸면 안됩니다. 

다 야망입니다.

 야망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못하는 사람인데 나를 세워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목회하는 것입니다.

 내가 낫다고 생각하고 목회하면 교만입니다. 단지 세움 받았는데 성도들을 인도할 뿐입니다.

 

저희교회는 부흥이나 돈을 목적하고 꿈꾸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 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진실된 삶을 사십시오. 

지금 모든 삶이 미혹되어 부흥을 꿈꾸고 물질을 꿈꿉니다. 

그게 뭐 필요합니까? 

하나님 앞에 옳은 삶을 꿈꾸고, 바른 삶, 깨끗한 삶, 거듭난 삶 살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마음으로 삶을 사시면 됩니다. 

왜 머릿속에 많은 영광들이 있고 왜 많은 꿈을 꿉니까? 

하나님이 꿈꾸면 다 이루어주신다고요? 

다 미혹들입니다. 

내게 있는 처지를 감사하십시오. 

양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감사하십시오. 

마태복음 동영상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 줄 모릅니다. 

한 명 인도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 줄 모릅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을 섬겨줍니다. 

내 모든 야망이 무너지고 내 모든 꿈들이 무너집니다. 

야망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만듭니다.

 야망을 버리면 진짜가 옵니다.

 

어떤 성도에게 손을 얹었는데 하나님을 정말 만나길 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네가 날 만나기를 원하느냐? 

나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 진리는 항상 참 이상합니다. 

내가 대단하게 되려고 애쓰면 짓밟히게 되는 것이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깨달으면 나를 올려주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먼저 아셔야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성령의 음성과 은사와 많은 기도와 뜨거움을 추구하며 성령의 역사를 추구합니다. 

거기서 성령의 역사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가장 낮은 곳에 가장 높은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물질의 어려움을 토하면서 나 이렇게 살아야 되나 그렇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하나 얼마나 감사한 줄 모릅니다. 

상대적으로 바라보면 더 나아 보이는 것이 부러워 보입니다. 

마태복음 출판도 제가 출판하려고 꿈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출판하도록 인도하셔서 출판하게 된 것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잘 먹고 잘 살라고 예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먹이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병이어 목표는 군중이지 제자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성도들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선교사 목사 전도사 왜 합니까? 

‘군중들에게 차려 놓도록’입니다.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성도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중보하십시오. 

통로는 어차피 잘 먹게 되어 있습니다. 

군중이 줄면 내 양은 더 적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양떼들을 위해 내가 땀흘리고 피 흘리면 그 댓가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게 있는 두 명의 영혼이라도 귀중히 여기고 눈물 흘리고 애를 써야 됩니다. 

오지 않는 사람들을 꿈꾸는 것은 야망입니다. 망상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꿈꾸다 죽습니다.

 ‘목회가 꿈이었는데 실패했어’ 예수님의 참된 종이 아니라 자기 야망 때문입니다. 

야망은 욕망에서 옵니다. 

내게 있는 영혼들을 위해 눈물 흘리며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가족들에게 잘하는 것이 출발입니다. 

현재 있는 것을 잘하고 충성하십시오. 

멀리 있는 것 꿈꾸면 다 잘 안됩니다. 

지금 사역이 없더라도 감사히 겸손히 하다보면 사역의 큰 홈런을 남기는 겁니다. 

오는 공만 잘 보고 직시하며 치기만 하면 멀리 갑니다.

 

남을 인도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낮아져야 합니다. 
저는 마태복음 동영상도 아무도 안 볼 줄 알았습니다. 
저는 잘 난 것 없기에 여러 일도 꿈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시니 순종하며 해 왔을 뿐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알아서 하나님이 영혼들을 모이게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의 복을 주님이 주시고 우리는 중간에 영적 육적 빵을 나르는 사람입니다. 
군중들을 잘 먹여 살리는 것이 목사의 책임입니다. 
교회 가운데 어려운 성도들을 많이 도와주고 반드시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 군중들의 아픔은 목회자의 아픔입니다. 
호화 목회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성도보다 중간이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같이 천국 가는 길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중간에 떡을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혼자 가서 먹고 있다면 제자입니까? 물질은 성도들에게 주라고 있는 겁니다. 
잘 나누어 주어서 매 예배 때마다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지금도 있는 사건이며 중간에 제자들과 목자들은 감당하는 심부름꾼입니다. 
마치겠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8장484절강해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8장481절강해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8장480절강해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4장150절강해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7장395절강해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7장403절강해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7장421절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