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7장399절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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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누가복음 399절

오호, 어떤 율법사가 일어났으며, 그 분을 시험하여 말하길, “선생님! 무엇을 행하여 영원한 생명을 상속하겠습니까?” 

그러자 그 분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 기록되었느냐? 어떻게 읽느냐?”

누가복음 399절 말씀입니다.

‘오호’ 새로운 장면, 새로운 감정을 강조하기 위한 강조어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났으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설명하는 사이에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새로운 장소에서 일어났는지 확실히는 모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했지만 성령님이 쓰신 것입니다. 

확실히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제자들은 전부 순교 당했습니다. 

구원받으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면 다 순교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리입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 십자가 지시는 것처럼 구원자체가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지금 또 다른 구도자가 있는데 율법사가 있습니다. 

‘그 분을 시험하여 말하길’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의 입장에 있는 것과 동시에 시험하는데 나름대로 답을 가지고 갑니다. 

질문을 할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답으로 합니다. 

맞으면 오케이며 아니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유의 사람들은 진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앞의 종교지도자가 하나님이 맞는 것 같은데 내가 말하는 이것이 이루어지면 맞는 것이고 아니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고 질문하는 겁니다. 

이런 스타일의 신앙인은 천국가기 힘듭니다. 

율법사는 신학박사이며 총장에다가 누구나 아는 신앙의 최고봉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는요. 

이 사람은 늘 가르친 사람이고 진리에 무장된 사람입니다. 

당연히 신흥하는 종교지도자로 보이는 예수님에게 시험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용어가 다릅니다. 

주님이 아닙니다. 

‘무엇을 행하여 영원한 생명을 상속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진리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구약에 없습니다. 

구약에 ‘생명’은 참 많은데 ‘영원한 생명’은 신약에 있는 개념입니다. 

이 율법사는 성경을 많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많이 연구하지 않으면 개념이 안나옵니다. 

성경을 많이 연구하면 구원의 개념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속죄, 성결, 더 나아가 구원상실, 더 나아가 죄, 구원을 잃는 죄가 나오고, 구원을 잃지 않는 죄가 나오며 아주 복잡해집니다. 

성경은 연구하면 할수록 무한한 바다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성경을 연구했으면 ‘영원한 생명’을 알까요? 

‘상속하겠습니까?’도 나오는데 정확한 단어를 씁니다. 

이 질문의 문장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무엇을 믿어야’도 아니고 ‘무엇을 행해야’입니다. 

정확한 질문입니다. 

‘무엇을 행하여 영원한 생명을 상속하겠습니까?’

 

‘그러자 그 분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래 너의 질문이 좋은 질문이야’ 하시며 엉뚱한 질문으로 치십니다. 

전혀 새로운 답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래 알려줄게’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 기록되었느냐?’ 

율법사가 생각하기에 율법과 거리가 멀거나 새로운 이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야! 네가 이제까지 배운 내용 중에 답이 다 있어. 율법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 

그 안에 답이 다 있어. 넌 내가 새로운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아니야!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을 더 자세히 말할 뿐이야‘ 신약은 구약을 자세히 말한 것입니다. 

신약은 구약 위에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 있는 내용을 자세히 풀어쓴 것입니다. 

이미 시편에 히브리서 말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분노하여~‘ 이 말씀을 히브리서에 기록한 것뿐입니다. 

시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다 써있고 4복음서에서 자세히 다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신약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new라고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의 내용을 상세히 알려주는 것뿐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혀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자세히 풀 뿐입니다. 

그래서 new가 됩니다. 

창세기 안에 구원이 있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룻기 등 모든 각 성경에는 다 구원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를 깨달아도 정확히 깨달아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도 내 것이 안 되면 영이 성장이 안됩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한 권에도 구원이 있고, 한 장에도 구원이 있고, 한 절에도 구원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대부분 지옥 가는 이유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율법사도 성경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겁니다. 

’너 성경박사지? 하지만 잘못 깨달았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읽느냐?’ 

남들을 가르치면서 읽거나 성경을 종합했을 것입니다. 

율법사가 성경을 접근한 방법이 잘못 되었기에 실패가 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영이 좋아집니까? 

성경을 많이 연구한다고 영이 좋아집니까? 

헬라어 히브리어 공부한다고 좋아집니까? 

어떤 성도분이 히브리어 번역을 하시는데 하나님이 ‘내가 네 번역한 책을 찢고 싶다’ 책망 하셨습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성경 말씀이 감동이 와야 되는데 그냥 세속적인 것이 들어갔습니다. 

성경을 번역해도 해석해도 읽어도 연구해도 오디오로 들어도 변화가 없으면 의미 없습니다. 

어떻게? How? 왜 하느냐? 성경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에 안됩니다. 

성경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대로 행하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율법사는 행하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봅니다. 

또 가르치려고, 이해해서 오는 쾌감으로 봅니다. 

이것은 아무의미 없습니다. 

설교를 알려고 듣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설교를 요약하는 것도 설교를 적는 것도 의미 없습니다. 

성경은 이 말씀이 내 것이 되지 않으면 지식이나 아는 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오히려 교만해질 뿐입니다. 

설교내용을 잘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 영생을 주며 구원으로 인도하는 책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어떻게 읽느냐? 입니다. 

한 절 한 절 가운데 우리는 무너져야 됩니다.

 

제가 1999년에 번역을 시작합니다. 2009년에 4복음서 헬라어번역이 다 끝납니다. 

그리고 로마서를 하고 나서 진행을 더 이상 못합니다. 

그 이후 3년 동안 산상수훈만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회개에 돌입합니다. 

산상수훈 말씀으로 5년 정도 매일 회개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번역을 못 느꼈습니다. 그러다 2012년 하나님을 직접 만납니다. 

3년 동안 하루도 울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영에 들어올 때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경험하고 나면 말씀 앞에 깨어지는 겁니다. 

‘내가 뭔가’ 자괴감으로 매일 목 놓아 웁니다. 

과거도 그렇지만 현재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서 우는 겁니다. 

우는 내용은 한 마디입니다. 

‘나는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며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번역만 계속 했더라면 하나님을 못 만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씀이 내면화 되지 않으면 깨달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 말씀대로 행해야 구원받습니다. 

말씀대로 행해야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구원받습니다. 

하나님 아는 것, 만나고, 음성 듣는 것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봤다 느꼈다 들었다 이런 것들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구원받습니다. 이것을 제가 깨닫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구원은 행함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운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니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겁니다. 

단행본 설교 등 자기가 들은 것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대부분 지옥 간 사람들의 설교며 단행본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나 머리에 넣으려고 듣습니다. 

그러니 칼럼을 많이 보아도 말씀을 많이 보아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하나를 더 깨닫는다고 더 알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예배입니다. 

10시간 예배드립니다. 

1시간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정,의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신앙이 잘못된 이유가 여러분은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코끼리 그림을 많이 그려보고 내장을 연구하며 그리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 만져보면 아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만지는 것이며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가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여행을 하면 욕을 합니다. 

하나님이 화가 나시면 심판이 임합니다. 

징계를 당합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화가 나게 하면 불신이며 하나님이 때리십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우리를 축복 내리십니다. 

축복과 심판은 항상 있습니다. 

우리 평생은 순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 순간의 결정이 하나님을 화가 나게 하느냐 안나게 하느냐입니다. 

룻이 나오미 따라 갑니다. 

믿음의 족보에 나오고 구원받습니다. 신앙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선택함에 따라 많은 내용이 있는 겁니다. 

룻이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나오미만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배운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신앙은 하나님 아버지만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신앙은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순종, 행함입니다. 

거기에 영생이 결정되고 우리의 축복이 결정됩니다. 

사역도 공부나 신학교나 훈련도 아니라 순종입니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를 오래 하면 쓰임 받습니다. 

사역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축복이나 영생, 생명이건 원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혜 있다고 성공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지혜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순종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깨달음을 위해 읽는다면 독이 됩니다. 

교회를 다니고 말씀 많이 안다고 목사가 되어도 간통죄 등 죄를 짓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선하게 보여도 결국 죄 짓고 지옥 갑니다. 

이것이 잘못된 폐해입니다. 

지옥 밑창에 떨어집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지옥 중간에 있을 것입니다.

 

성경 앞에 무너져야 됩니다. 

말씀 앞에 무너져야 됩니다. 

통곡이 일어나야 됩니다. 

저는 몇구절 안되는 산상수훈을 보며 하나님 앞에 매일 통곡합니다. 

한 절을 보더라도 통곡이 일어나야 합니다. 

찬양 하나로도 통곡이 일어나야 합니다. 

안 그러면 시간만 지나고 여기 율법사처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천국가기를 원합니까? 

사모하십니까? 

진리를 찾는데 사모하십니까? 

그러면 말씀을 보는 각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무너지면 다른 신앙책을 다 끊게 됩니다. 

도움이 안됩니다. 

여러분 책을 읽어도 죄가 안 끊어지며 변화가 안됩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예배를 드려도 참된 은혜가 임하지 않고 변화가 안되는데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키고 죄를 끊게 만들며 온전히 새롭게 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하지만 요즘 기독교는 온통 가짜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이 많은 예배를 드리지만 변화가 안됩니다. 

많은 부흥회 참석도 변화가 안됩니다. 미국에 계신 분은 웬만한 집회는 다 돌아다니고 성경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동영상을 접하고 보면서 통곡이 나오고 애통이 나오고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변해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놀라워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부흥회, 많은 말씀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이 율법사처럼 성경을 보면 안됩니다. 성경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말씀인데 한 절 한 절 앞에 무너지고 변화되고 새로워질 수 있는 말씀인데 왜 안되느냐? 
‘어떻게’ 입니다.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을 왜 보느냐? 
내가 말씀 앞에 무너지는 것이 목적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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