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7장402절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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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누가복음 402절 

그가 자신을 의롭게 여겨지기를 원하여,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누가복음 402절 말씀입니다.

‘그가’ 율법사입니다. 

‘그래 네가 옳게 이야기 했어. 이걸 행해. 그러면 생명을 얻어’라고 진리를 말씀하시니 첫 반응이 ‘자신을 의롭게 여겨지기를 원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행했는가?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나는 행했어’ 자신이 의를 행했다고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천국에 못가는 중요요인입니다. 

‘십계명 지켜’ ‘응 나 거짓말 안해, 간음 안해’ ‘산상수훈 지켜!’ ‘그래 나는 구제를 잘해’ 자기는 하나님말씀 잘 지킨다고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런 큰 죄를 짓지 않아’ 생각하지 ‘그래 나는 죄를 지어 어떡하지’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구요? 

우리 행위가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내 행동이 안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화를 냅니다.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나한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남이 볼 때 보는 나가 있습니다. 

내 죄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왜 성령의 음성이 있을까요? 

우리가 진짜 행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지적해주십니다. 

안수 기도할 때 우리는 정확하게 집어주시는 감동 때문에 놀랍니다. 

입술의 죄, 행동의 죄를 지적해줍니다. 빛 앞에 우리를 드러내주는데 우리가 바로 살도록 도와줍니다. 

저도 늘 불완전합니다. 

저도 안수 받으면 지난주는 ‘너는 왜 성도들에게 헛바람질 넣느냐?’ 

한번은 또 ‘왜 너는 잘못된 예화들을 드느냐?’ 저의 죄를 지적해줍니다. 

성령의 음성은 우리의 내면세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걸리는 내용들을 지적해주십니다. 

저희 교회가 안수를 많이 하는 이유는 우리의 잘못된 것들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 잘못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안수를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내 자신이 노출되고 내 부족을 깨닫게 됩니다. 행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결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우리가 완전하면 우리가 왜 말씀을 보겠습니까? 

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우리는 늘 불완전합니다. 

어제 완전했어도 오늘 실패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나를 살펴야 됩니다. 

이 율법사가 자기를 의롭게 여깁니다. 이것이 지옥 가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고 또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모릅니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면 마음속에 항상 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근신합니다. 

애통합니다. 

회개합니다.

 

율법사가 지옥 간 이유는 자기가 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율법사는 지금 자기가 이웃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아주 애매하고 교묘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내가 사랑하는지 나를 물어봐야 하는데 나를 물어보지 않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은 나를 물어보지 않고 상황전개만 합니다.

그 사람 망했대 그 사람 이혼했대 그 사람 어떻게 되었대 등 딴이야기만 합니다. 

율법사가 자기 이야기를 안 합니다. 

‘예수님 내가 이 말씀대로 행합니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문제가 중요한데 ‘누가 내 이웃입니까?’ 물어봅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쓸데없는 질문이지만, 다음 이야기에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열어주는 키가 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 이웃에 대한 정확한 표현에 질문을 준 것이 율법사입니다. 

이 질문이 왜 엉뚱하냐? 

율법사는 이런 답을 원했을 것입니다. 이웃은 내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회 사람들을 말하는 보편적인 만남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사는 가정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고 자기 질문을 대화에서 끝을 맺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네 아내를 사랑하면 되는거야’ 예수님이 답변하시면 아멘!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행하니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대답이 나오는데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 답변은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합니다. 

어거스틴도 이 설교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설교가 없습니다. 

다 가짜입니다. 

이것을 신학으로 풀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사도 신학적으로 풀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는 율법사가 천국에 못 가는데 이 율법사가 왜 이웃사랑을 못하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죠? 

율법사는 이웃사랑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의롭게 여긴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너는 율법을 어기고 있어’ 지적하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잘못을 못 깨닫는 이유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 잘못 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요합니다. 

오늘날 크리스챤들이나 여러분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거울과 같아서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들어도 나를 찌르는 말이 없습니다. 

왜 없느냐? 

남이야기 합니다. 

이율법사는 남이야기를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합니다. 

그런 질문을 왜 합니까?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풉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설교를 위해서 남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은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내 스토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목사들은 강대상에 서면 남이야기 합니다. 

회개안하고 눈물 흘리지 않습니다. 

말이 뻣뻣합니다. 

남 이야기하고 예화를 잘 듭니다. 

자기 이야기를 안합니다.

 

마태복음 스토리는 제 이야기와 그리고 교계 이야기를 씁니다. 

누가복음은 저희교회 내용을 풀어갑니다. 

우리는 제 3자와 멀리 있는 사람들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 중요한가? 

내가 중요합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면 변화 안됩니다. 

율법사가 왜 이제까지 구원을 못 받았을까요? 

성경을 남 이야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저 설교는 ‘어느 성도가 들어야 돼’ 하는데 설교는 나를 위해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나를 위해 필요합니다. 

저희 교회는 저도 안수를 받습니다. 

저도 안수 받고 은혜를 받아야 하며 죄를 지적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도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만 머리 되시고 다 양들입니다. 

우리는 나의 이야기로써 말씀을 듣는 것이고 우리는 말씀 앞에 우리를 조명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목사건 성도건 아무나 자유하지 않습니다. 

율법사가 최고봉에 있었기에 서기관들을 가르치고 바리새인을 가르치니까 자기는 남이야기 하며 살았습니다.

 이 사람의 구조는 남이야기입니다. 다 남이야기입니다. 

그런 구조는 천국이 어렵습니다. 

천국은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이 비춰져야 하고 내 부정이 깨달아져야 되고 다 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럴 때 같이 울음이 터지고 동화되어집니다. 

엄마가 울면 자녀도 웁니다. 

목사가 울어야 성도가 웁니다. 

목사가 안 우니까 성도들이 울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남이야기 하니까 성도들도 같이 남이야기 합니다. 

저는 중고등부 부장할 때 집회하면 학생보다 맨 먼저 달려가 벽 앞에 통곡하며 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위해 신앙생활 하십니까?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목적입니다. 

누가 변화되어야 할까요? 

누가 나를 구원할까요? 

내가 변화되어야 하고 내가 예수님께 구원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꾸로 하기에 신앙이 안되는 겁니다. 

변화는 내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고꾸라져야 되고 다 내가 되어야 합니다. 

직분자로 세우고 인도자가 되면 대부분 지옥 가는데 포인트가 나가 되어야 하는데 남이 되기 때문입니다. 

직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사도 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가장 낮게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변화 받아 내가 성장하는 겁니다. 

내가 성장하면 교회 성도들은 성장합니다. 

성장은 본인이 되면 자동적으로 인도받는 사람들은 따라서 성장합니다. 

저도 매일 부단 없이 성장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니면 다 죽습니다. 

산모가 젖을 먹이는데 밥을 안 먹으면 젖이 안 나옵니다. 

산모가 많이 먹어야 합니다. 

지도자도 은혜를 많이 받아야 그 은혜가 흘러갑니다. 

성도가 은혜 없으면 목사가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모든 원인은 나에게 두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왜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정신이 나갔느냐? 

다 가르치려 하니까 자기가 안 보이는 겁니다.

 내가 보여야 됩니다. 

허물과 단점과 잘못이 보여야 합니다. 내 부족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남들은 내가 나가니까 따라서 오는 겁니다. 

포졸이 앞에 나가지 않고 장수들이 왕이 항상 앞에 전진합니다. 

장수나 왕이 전진하다가 죽으면 지는 건데 포졸들이 왜 앞에 나가지 않고 항상 왕과 장수들이 앞에 나갈까요? 장수가 앞을 향해 돌진하면 뒤에 있던 부하들이 와~ 하며 달려갑니다. 

왜일까요? 

왕도 저렇게 싸우는데 하찮은 나도 하며 목숨을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남들을 인도할 수 있을까요? 

내가 먼저 전진해야 합니다. 

목사님도 저러는데 하며 성도가 따라갑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장수가 앞에 나가지 않고 밑에 사람들을 자꾸 내보내려 하면 지는 겁니다.

 

신앙생활 할 때 뻐기거나 직급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 죽도록 달려갑니다. 

신기하게 하나님은 보호해주십니다. 옆의 부하들이 보호해줍니다. 

내가 진정 이웃이 되었는가? 

나를 향한 신앙으로 바뀌지 않으면 성경에 박식한 율법사처럼 엉뚱하게 들어갑니다.

 유명한 목회자가 설교 잘해도 부인들은 당신이나 잘하지 하며 속으로 욕합니다.

 설교가 남이야기입니다.

 부인이나 자녀들은 거짓말한다고 웃습니다. 

목회자 자녀들이 방탕한 경우가 목회자가 앞뒤가 안 맞다고 방탕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남들 앞에서 보이는 내 모습은 진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나아가야 되는데 왜 안되느냐? 

율법사입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내가 이웃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생각의 질이 바뀌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바뀌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안될 것 같으면서 변화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안변하면 상대방도 안변합니다. 내가 바뀌면 상대방도 바뀝니다. 

내 혈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은혜가 임하면 배우자가 변화되어 돌아옵니다. 내 안의 어둠이 있는 것을 완전히 제거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먼저 부모가 바뀌어야 자녀가 바뀝니다. 

내가 먼저 바뀌면 같이 있는 가족이 돌아옵니다. 

선교는 바로 옆입니다. 

제가 처음에 신전도사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네가 저를 바꾸어 놓지 못하면 너의 사역은 불가능할 것이다’ 

신기하게 신전도사님은 쉽게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사역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역은 빛의 전파이지 이론의 전파가 아닙니다. 

불이 타면 옆으로 번집니다. 

내가 바뀌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면 회개가 점점 전파됩니다. 

복음전파는 사실 회개의 전파입니다. 변화된 내 모습을 통해서 점점 주변이 변화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냥 교회 나와, 기도해, 말씀 봐 안됩니다. 

그보다도 내 동영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나의 인내와 나의 거룩을 보여주고 참믿음을 보여주고 사랑을 보여주는 겁니다. 

가장 큰 교육은 실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복음전파는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중국, 미국, 제주도 딴 동네가 아닙니다. 

나의 바로 옆사람이 복음전파 대상입니다. 

나의 동영상을 보여주면 그 사람도 변화됩니다.

 

저희 교회는 고정된 멤버지만 많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숫자 부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맞이하는 행동의 변화를 주는 회개의 부흥이 진짜 중요하며 이것이 진짜 부흥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보여주시면서 ‘너도 이렇게 행하라’고 집어줍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를 보게 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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