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누가복음(죄사함의조건:회개)7장435절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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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누가복음 435절

그 분이 이것을 말씀하시게 되자, 

군중에서 어떤 여자가 소리를 높여 그분께 말했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젖 먹인 가슴이 복 있습니다.'

누가복음 435절 말씀입니다.

‘그 분이 이것을 말씀하시게 되자’ 

예수님이 벙어리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니까 사람들이 귀신을 힘입어 쫓아내는 것이 아니냐? 

의심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귀신론으로 귀신의 세계를 쫘악 도해하는 것입니다. 

처음 듣는 내용이라 사람들이 놀랍니다. 

‘군중에서 어떤 여자가 소리를 높여 그분께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적게는 몇 백, 몇 천명 정도 아주 많으니까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 너무나 똑똑하십니다. 

모르는 게 없으십니다. 

서기관 랍비 율법사와 비교가 안됩니다. 

당신의 설교를 들어보니 이렇게 박식한 분 처음 봤습니다. 

오 놀랍네요!’ ‘당신을 밴 태’ 즉 자궁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임신하죠. 

‘젖 먹인 가슴이 복 있습니다’ 

옛날에는 다 모유수유 했습니다. 

엄마가 당신을 배고 수유한 배가 복 있다고 합니다. 

‘당신처럼 될 정도로 어머니가 양육하고 키웠을 것인데’ 옛날에는 가정교육이 주로 지적발달의 요인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키운 사람은 얼마나 지혜로울까요?’ 

과거에는 모계사회라 어머니가 주로 양육합니다. 

‘어머니가 양육하는데 이렇게 놀라운 말씀을 주시니 당신을 밴 태와 젖먹인 가슴, 어머니는 얼마나 위대할까요?’ 

복은 천국을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당신 같은 위대한 사람을 낳았으니 당신 어머니는 천국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군중가운데 여자가 탄성을 지른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들 가운데 그렇게 말하기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 감격스러우니까 소리 지른 것입니다. 

이 설교 내용이 너무 은혜로우니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그래 나 대단하고 나를 낳아준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로 태어났고 대단한 사람이었어! 

어릴 때 키우실 때 모르는 게 없는 분이야’ 하고 마리아를 `칭찬하거나 마리아에 대해 어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잘 듣고 감탄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아주 잘하면 아멘! 아멘!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블로그에 많은 내용들이 나갑니다. 

큰 교회에서도 보기 힘든 많은 내용들과 어려운 내용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을 연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나 와 대단하다! 하는 것도 소화하고 암기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앎이라는 것은 거의 의미 없다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앎이 목적이 아니라 작은 것을 알아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 선조들은 성경을 잘 몰랐지만 대단히 바르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가 성경을 엄청나게 배웁니다. 

달달 외우고 몇 장 몇 절이 있고 다 압니다. 

그런데 구원을 잃어버립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데 구원을 잃어버립니다. 

성경이 없고 성경을 모르던 일제 사람들은 구원을 거의 잃지 않는데 다릅니다. 

성경은 순종하고 행함에 목적이 있지 앎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꿰뚫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주 작은 내 삶의 부분에서 실천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변에 가벼운 영역가운데 사랑하고 용서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포용하고 관용하고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영적전투가 일어나는 것이지 아인슈타인처럼 우주를 다 아는 것이 필요할까요? 

그런 것 몰라도 내가 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영역입니다. 

사람 사는 영역은 되게 작은 영역입니다. 

집안의 엄마가 음식 잘하고 빨래 잘하고 주변에 아주 간단한 영역입니다. 

교회에서도 헌금 잘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할 때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며 추구합니다. 

현대인 성도는 머리는 크고 몸은 작습니다. 

예수님처럼 엄한 것을 많이 알고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누가 크게 될까 입니다.

 

기도회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대학교 때 교만해서 은혜를 많이 못 받았습니다. 

나는 왜 은혜를 못 받을까 하나님 왜 나는 은혜를 못 받는 존재입니까 하며 안타깝게 살아가는 청년시기였습니다.

 반대로 은혜 받고 오면 기고만장합니다. 

내가! 하다가 삶에서 넘어집니다. 

은혜를 안 받으면 겸손해져서 나에 대해 한심하고 절망적이고 내가 초라해서 늘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나가는데, 그깟 은혜 조금 받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건방 떨다가 넘어집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고, 은혜를 안 받았다 해도 은혜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참된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상황 앞에 좌절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르게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바른 삶이 목적인데 아주 많은 은혜를 받고 말씀을 많이 깨닫는데 중점을 두면 실제 본론은 삶이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이 중요합니다. 

뜻대로, 의롭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 없이 종교적으로 은혜 많이 받는다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어제 7시간 기도회는 아주 은혜로웠습니다. 

몇 분 안수자들이 기도할 때 아주 성령의 감동이 강하게 임했습니다. 

저도 안수자들의 기도를 받을 때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안수 내용 중에 120세 장수가 나왔는데 조건이 ‘죽도록 충성하라’였습니다. 목적이 장수가 아니라 얻을 정도의 충성입니다. 

순교자로서의 충성을 하나님이 제게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님들도 다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목적은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얻는 것이지 예배자체에 승부수를 두면 안됩니다. 

승부수는 삶에 있습니다. 

삶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내 모든 삶에서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겸손하고 낮아지는 삶의 모습이 보여지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혜가 부족할지라도 삶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놀라운 지혜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존경할 수 있지만 그 자체에 빠지면 안됩니다. 

왜 신학하면 맛이 갈까요? 

신학 하다보면 배우는 내용에 감탄합니다. 

신학생들이 신앙이 좋아질까요? 

더 까먹습니다. 

그렇게 배운 지식과 내용들이 삶에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에 연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설교가 왜 사람들에게 어필되냐? 꿈 이야기나 딴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적용될 수 있는 설교를 하기에 예배시간에 졸지 않습니다. 

설교를 연구하거나 고차원적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삶에서 적용되는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영어 수학을 배우면 삶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배울 때 내게 쓸 수 있는 게 중요합니다. 

일반적인 신앙생활이 중요하며 적용이 중요합니다. 

왜 신학하고 박사하면 몇 구절 연구한 것 가지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지혜의 말씀을 전달해주기 위해 쓰일 뿐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저는 신학적으로 많은 노하우와 깊이가 있어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해석학에 대한 큰 틀을 만들어주기 위해 저를 사용할 뿐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신앙이 깊은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깊고 넓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주의 뜻을 적용해야 합니다. 

신앙은 간단합니다. 

3시간 기도회 끝나고 나서 제가 계시 설교를 합니다. 

받은 말씀을 전하는데 일반적인 내용을 합니다. 

일반적인 내용이라도 적용하는 말씀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이제 어떤 것을 평가할 때 그의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사상, 논지가 아니라 행함이 있는가? 
평가해야 합니다. 
내가 행함이 있는가? 
여러분! 
행함이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주 평가 대상입니다. 내가 얼만큼 아느냐가 아닙니다. 
과연 행동하고 사느냐? 입니다. 
과연 내가 말씀으로 사는가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가 가 중요합니다. 
하루라는 시간과 건강과 물질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얼만큼 뜻대로 행하느냐? 
여기에 인생이 달려있는 것이지 많은 것을 연구하고 깨닫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 늘 마음에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고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고 얼마나 영적세계를 가고 신비한 것을 보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세계 속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얼마나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였는가? 
행함 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평가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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